1977년 8월16일. '로큰롤의 황제' '로큰롤의 슈퍼스타'로 불리는 엘비스 프레슬리가 사망했다. 그는 정크푸드와 진통제, 수면제, 안정제에 절어 테네시주 멤피스에 있는 자신의 저택 그레이슬랜드의 화장실에서 발견됐다.
하지만 엘비스의 사망 이후 사망원인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공식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하지만 그의 주치의는 엘비스의 진짜 사망원인을 '만성변비'라고 주장했다. 부검기록 결과에 따르면 엘비스의 모든 기관들은 망가져 있었다.
엘비스는 죽기전, 7개월 동안 9000정(pill)에 달하는 먹는 약, 주사제를 처방받았다 한다. 이렇게 많은 약을 처방했던 의사(DR. Nick)는 엘비스가 죽은 후 비윤리적 약물처방 이유로 기소당하기도 했다. 엘비스가 그 많은 약을 먹었던 이유는 과도한 욕망, 스트레스, 과로, 우울증, 두통, 어지럼증, 불면증 등 여러 질병과 증상에 시달렸기 때문이었다.
엘비스의 평소 식습관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는 말년엔 치즈버거를 달고 살 정도였다고. 여기에 여러 과용된 약물로 장기 기능이 훼손됐다. 죽기 전 4개월 동안에는 거의 변도 보지 못했다. 부검당시, 엘비스의 장에서는 4개월 묵은 엄청난 양의 변이 나오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주치의가 실제 사망원인을 '변비'라고 주장한 것이다.
평범한 백인 아이에서 20세기 문화 아이콘으로
엘비스는 1935년 1월8일 미시시피주 투펄로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다니면서 엘비스는 교회에서 음악적 영감을 많이 받았다.
어린시절 엘비스는 조용한 평범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당시 엘비스의 교사는 엘비스를 '보통(average)' 아이라고 평가했다. 엘비스는 매일 학교에 기타를 들고와 점심시간에 노래하고 연주를 하면서 지냈다. "음악에 미친 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했다.
그는 백인이었지만 살았던 곳은 흑인들이 많은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흑인음악을 익히게 됐다.
엘비스는 제대로 된 음악 수업을 받지 못했고 악보를 읽지도 못했으나 귀동냥으로 학습하고 연주했다. 그는 로이 아커프, 어니스트 터프, 데트 다팬, 지미 로저스, 지미 데이비스, 밥 윌스 등 컨트리 가수의 음반을 자주 들었다. 남부 가스펠 가수 제이크 헤스는 엘비스가 가장 사랑한 아티스트 중 하나로서 그의 발라드 가창 스타일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엘비스는 음악을 직업으로 점찍어뒀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56년 1월. 엘비스는 RCA Victor 레코드사에서 싱글 'Heartbreak Hotel'을 발매하며 공식적으로 데뷔했다.
무명기도 없이 엘비스는 음반을 내자마자 큰 인기를 얻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엘비스가 당시 주요 미디어들이 천박하다고 경멸하던 로큰롤 음악을 선보이며 미국을 뒤흔들어놨다. 특히 하반신을 흥겹게 흔드는 당시로는 아직 파격적인 춤이 보수적인 기성세대들에게 혐오를 받았으나 젊은 층에게는 인기가 대단했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외모, 떨리는 듯한 개성 짙은 노래기법과 감미로운 목소리를 지닌데 반해 박력있고 카리스마 넘치는 퍼포먼스는 대중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줬다. 그러면서 그는 대중음악계의 판도를 뒤집은 문화의 아이콘이됐다.
엘비스는 군대도 갔다왔다. 당시 미국은 징병제를 시행하고 있었고 이에 따라 병역의무가 부과돼 1958년에 입대했다. 주 서독 미 육군에서 복무를 했는데, 당시 수많은 여성팬들이 엘비스 프레슬리를 보기 위해 서독을 방문했다.
엘비스는 영화로까지 영역을 넓히며 배우로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데뷔한지 몇 개월 후인 1956년 11월, '러브 미 텐더'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은막에 데뷔했고 이후 잠깐 사랑에 빠졌던 앤 마그렛이 여주인공으로 같이 나온 'Viva Las Vegas'(1964)에서부터 다큐멘터리 'Elvis on Tour'(1972)까지 총 3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10년 동안 30편의 영화를 찍었으니 매년 3편을 공장식으로 찍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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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 하와이 콘서트 포스터. |
엘비스는 데뷔한지 20년 동안 인기를 끌면서 로큰롤의 제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73년 하와이 콘서트는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으로 생중계된 공연이 되기도했다. 하와이 콘서트는 전 세계의 15억 인구가 시청했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했다.
하지만 엘비스는 하와이 공연 이후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1973년 10월에는 아내 '프리실라'와 합의 이혼했다. 엘비스의 외도와 방탕한 생활이 이혼사유로 알려졌다.
엘비스는 이혼에서 오는 상실감을 이겨내고자 '폭식'을 했고 한 때 74kg이었던 몸무게가 117kg까지 늘었다. 그는 잠들기 위해 '수면제'를 복용하고 잠을 깨기 위해 '각성제'를 복용했다. 1973년부터 엘비스는 각성제, 진정제, 각종 양물 남용으로 몇 차례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특히 지병인 '변비'로 1975년경부터는 대변을 거의 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엘비스는 몸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주치의가 '항문 이식수술'을 권했으나 엘비스는 연예인이라는 신분으로 인한 중압감 때문에 이를 망설였다. 그로인해 여러가지 합병증을 앓아왔고 결국 '심장마비'로 4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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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비스 프레슬리의 사망 직전 살찐 모습. |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을 판매한 솔로 가수
엘비스는 대중음악 사상 최초의 록스타이자 당시 음악계의 주류를 혼자만의 폭발적인 인기로 변화시켜버린 대중음악사의 거인으로 평가받는다.
사망한 지 50년이 다 됐음에도 아직도 현역 가수 못지않은 수익을 벌고 있다. 포브스가 사후 수익 순위를 집계한 2001년 이래로 한 번도 순위권에 빠진 적이 없으며 마이클 잭슨 사망 전까진 1위를 도맡았다.
엘비스는 흑백 인종차별이 매우 심하던 시대에 흑인 음악으로 세계적인 성공을 이루며 음악으로서 인종의 화합을 이뤘고 젊은 세대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우상으로 떠올랐다. 엘비스의 등장으로 대중문화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핵심이 중장년층에서 10대 ~ 20대의 젊은층으로 옮겨가게 됐다.
그만큼 역사적인 인물이어서인지 엘비스의 죽음 이후에도 '생존설'도 끊임없이 나돌았다. 1984년 무하마드 알리와 제시 잭슨 뒤에 찍힌 사진이 유명하다. 사진의 원본으로 추정되는 동영상, 역대 추정사진 모음 등 관련 영상들은 차고 넘친다.
일부 팬들은 엘비스가 죽은 것이 아니라 어딘가로 모습을 감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는 등 사후 수십년간 미국 전역에서 엘비스를 목격했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한편 공교롭게도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 리사 마리 플레슬리도 올해 1월 54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비만 방지 수술 후유증으로 인한 장폐색으로 나타났다. 리사 마리는 올해 1월 12일 오전 LA 카운티 칼라바사스 자택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가사 도우미에 의해 발견됐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숨졌다.
리사 마리는 엘비스의 유일한 자식이다. 겨우 4살이던 1972년 부모의 별거로 아버지와 떨어졌고, 리사 마리가 9살이던 1977년 아버지 엘비스는 사망했다.
리사 마리는 10대 시절부터 마약에 손을 대며 방황하기 시작해 일평생 여러 차례 재활센터를 오갔다. 배우 니콜라스 케이지와 고(故) 마이클 잭슨, 대니 커프, 마이클 록우드 등과 결혼했다 결별해 4번의 결혼과 4번의 이혼을 거듭했다. 또, 아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하는 등 가슴 아픈 가정사를 갖고 있다.
출처 https://news.mt.co.kr/mtview.php?no=2023080416314115867